사라진 을지로의 풍경을 그리다

김슬기 기자, 매일경제, 17 January 2023

정재호(52·세종대 동양화 교수)는 동양화를 전공하고 유화로 풍경을 그리는 혼종(混種)의 작가다.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작가전에 걸었던 ‘난장이의 공’은 세운상가에서 바라본 재개발 지역 풍경을 한지에 아크릴로 그린 작품이었다. 붉은 십자가로 뒤덮인 서울의 야경, 쇠락한 인천 차이나타운의 풍경, 철거 위기의 시범아파트 등이 함께 걸렸다.

이후 작가는 5년간 근대화의 상징인 세운 상가 일대를 밤낮으로 찾았다. 눈이 와도 비가 와도 달려가 건물 옥상에 올라 사진을 찍고 그림으로 그렸다. 지난해 철거되어 타워크레인이 세워진, 이제는 사라진 풍경을 캔버스에 ‘타임캡슐’처럼 박제한 셈이다.

서울 종로구 초이앤초이에서 2월 25일까지 열리는 정재호 개인전은 ‘나는 이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을 주제로 삼았다. 작가가 20여년 전 그린 한강 부근 풍경화에서 따왔다. 16일 만난 작가는 “옥상에 올라가 풍경을 찍어오면서 내가 여전히 이렇게 조망하는 것에 대한 향수가 있고 작업이 이어지는구나 싶어, 옛날 제목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동대문 아파트
동대문 아파트 [사진 제공=초이앤초이]

전시에는 철거된 예지동 복판에 남은 분홍색 건물, 눈 덮힌 대림상가 일대 풍경, 동대문아파트의 중정 등 다양한 풍경화가 걸렸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표제작과 같은 구도로 다른 계절을 그린 을지로의 풍경화들이다. 마치 좌표처럼 두산타워가 다양한 각도로 등장한다. 작가는 “어떤 풍경을 반복적으로 그릴 때 그 풍경은 더욱 잡을 수 없는 것이 된다”면서 “재개발에 어떤 목소리를 낸다기보다는 근대의 흔적을 사라지기 전에 풍경화로 남기고 싶었고, 몇달간 매달려 그린 그 공간의 삶의 체취도 기록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정교하고 사실적 표현력으로 정평난 작가지만 그는 “40년을 그림에 매달렸지만 그릴수록 더 부족하다는 생각만 든다. 이제는 시력도 떨어진다”라면서도 “이제 실제 도시 풍경을 그리는 화가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사진 같다’는 걸 넘어서는 실제 풍경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눈과 비가 내리는 낡은 건물은 카메라 렌즈보다 한결 따스한 색감으로 그려졌다. 그는 “사진을 셀수없이 찍었지만, 그리다 막혀서 다시 가보면 사진과 실재가 너무 달랐다. 카메라엔 잡히지 않는 볼 때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있었다. 내가 그리고 싶은 건 이 곳의 색감과 대기”라고 말했다.

긴 시간의 노동과 인내를 요구하는 대작들을 그는 작년 한해 안식년의 도움으로 완성했다. 그는 “학교에선 유행에 따라 트렌드가 휙휙 바뀌는 학생들에게 자신만의 길을 찾으라고 조언하곤 한다”면서 “나 역시도 풍경화의 본질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지만, 결국 갖은 수단을 동원해 정확하게 그리려고 노력하는 수 밖에 없더라. 정확하게 그렸을 때 추하지만 아름다운 지점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거리에서 이젤을 펴고 풍경을 그리는 스페인의 국민화가인 안토니오 로페즈 가르시아의 고전적 회화를 좋아한다고 털어놨다. 고집스런 장인은 말했다. “내 붓은 낡지 않은 것을 그릴때는 잘 안움직인다. 화가들은 미인을 결코 그리지 않는다. 낡은 대상이 주는 감동이 더 크다.”

비온 뒤 을지로
비온 뒤 을지로 [사진 제공=초이앤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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