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건물에 스며든 ‘삶의 체취’… 시대의 흔적을 담다

김신성 기자, 세계일보, 9 February 2023

중국 6세대 영화감독 자장커는 1980년대 중국 근대화 과정 속에서 발생된 도시 문제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소외된 인간 군상의 일상을 솔직하게 카메라에 담아낸다. 개발로 인해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포착한 것이다. 급격한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 과정을 겪으면서 빈부격차, 도시범죄, 인간성 상실 등 다양한 문제가 생겨났다. 이는 중국뿐 아니라 근대화 과정을 지나는 모든 나라에서 피해갈 수 없는 문제다.

자장커는 근대화의 뒷전으로 밀려난 사람들, 이를테면 가난한 노동자,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 의식의 변화 없이 사회 분위기에 휩쓸리다 길을 잃은 젊은이들에게 카메라의 앵글을 맞춘다. 그러나 그는 결코 이들을 처연한 심정으로 바라봐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시키지 않는다. 그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오히려 스크린 밖 사람들을 향해 당신들이 놓친 게 없는지를 되묻는다.

정재호의 작품들은 자장커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허름한 건물들을 한지와 캔버스에 사실적으로 묘사해온 그가 이번에는 지난 몇 년간 을지로를 배경으로 지속해온 신작들을 내놓았다.

한국의 급속한 성장기에 개발된 을지로는 현대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더 반짝이고 더 장황하고 더 높은 빌딩들 뒤로 지금은 방치되고 낙후되어 점점 낡아가는 건물들이 마치 타임캡슐처럼 남아 있다. 주름이 가득한 노인의 얼굴처럼 여전히 살아남아 한 세대의 역사를 증언한다. 이 건물들은 혼란과 빈곤이 일상이던 과거를 소환하면서 우리에게 콘크리트 벽 뒤 한때 머물렀던 삶,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인내했던 삶을 기억하라 말하고 있다. 작가는 점점 사라져가는 노후 건물들을 지켜보면서 그 특성과 의미를 화폭에 옮겨왔다.

곧 철거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건물들을 직면하며 그린 사실적인 그림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일종의 학구적인 아카이브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의 작업 중심에 자리 잡은 것은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건물 하나하나에 스며든 ‘삶의 체취’다. 한 시대를 살아가던 이름 모를 인물들의 흔적을 발굴해낸 정재호의 그림들은 그래서 더욱 서정적이고 아련하게 다가온다.

“어떤 장소는 그곳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있을 때 비로소 풍경이 된다”고 말하는 작가에게 이제 이 구역은 수년을 함께해온 동반자가 되었다. 장소가 지닌 사회적 특성, 기념비적 상징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지고, 그 자리에 작가 본인의 개인적 사유들이 자리 잡았다.

‘동대문 아파트’(2022) 캔버스에 오일, 194×130.3㎝

그는 시대상을 포착하는 과제에서 점차 벗어나 지금 이 풍경을 제대로 그리고자 하는 회화적 재현 그 자체에 더 충실하게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철거되고 사라져가는 풍경을 그리는 과정 또한 이전과 다른 절박함을 자아낸다. 철거를 앞두고 시간에 쫓겨 그린 눈이 수북이 쌓인 겨울, 폭우가 쏟아지는 여름, 쨍한 햇빛을 머금은 일요일 아침에 본 풍경 등은 이제 그림 속에만 존재한다. 점점 더 과거 속으로 밀려가는 주변과 마주하는 작가는 이 장소와 함께한 몇 년을 돌아보면서 어느새 을지로에 스며든 자신의 삶의 체취를 응시한다.

 

그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잊힌 기억을 되살리는 수단이며, 과거에 파묻힌 것들을 재발굴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그의 사실적이고 강박관념적인 ‘묘사’의 과정은 단순한 복제가 아닌 근현대 삶의 흔적을 찾아가는 포괄적 조사 및 수집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전시회 제목 ‘나는 이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은 작가가 20여년 전 그린 한강 부근의 풍경화에서 따온 것이다.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초이앤초이갤러리에서 관객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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