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레만, ‘사랑을 또다시 믿는다’·‘사랑은 죽음보다 뜨겁다’

김신성 선임기자, 세계일보, 22 July 2024

“제 작품의 특징은 자극적인 서사였습니다. 아직도 남아있긴 하지만 …, 지금은 두드러진 색상이 이를 대체했습니다. 팔레트도 여러 번 바뀌고 그림이 밝아졌는데, 기법이 좀 더 복잡해진 이유도 있어요. 저는 노란색 밑작업으로 시작하고 노란색 페인팅으로 마무리합니다. 삶은 빛에서 시작해 빛으로 끝난다는 비유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림 하나하나의 과정에서 삶의 순환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데이비드 레만(37)의 페인팅은 팔레트 위 가장 밝은색인 노랑으로 시작한다. 캔버스 위에 듬뿍 칠해 밑작업을 한 뒤 그 위에 여러 층의 다양한 물감을 입히고 채색해나가며 원래의 노란색을 점차 가려가는 형식이다. 이 노란색은 마치 어린 시절 기억처럼 희미해지지만 여전히 눈에 띄면서 캔버스의 흐름을 잡는 구실을 한다.

 

이 같은 작가의 ‘겹회화(layered painting)’ 기법은 중부 유럽 전통 회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레만의 작업은 여기에 북미 추상 표현주의에서 받은 영감을 가미했다. 광폭한 에너지로 복잡하게 얽힌 그림을 그리는 그의 붓질은 아슬아슬하다 할 만큼 꽤나 격정적이다. 

 

그는 나라와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어 철학, 문학, 영화, 사진, 음악, 미술사, 정치 등에서 소재를 흡수한다.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 가수 PJ 하비, 도스토옙스키의 라스콜니코프, 공상과학 소설 ‘듄’, 영화 ‘프리 윌리’ 등 다양한 출처에서 영감을 찾는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끊임없이 생산된 이미지를 직면해온 우리가, 이러한 풍요로움 속에서 어떠한 서열을 부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도파민’. 2년 걸려 완성했을 때의 기쁜 마음을 떠올려 이 같은 제목을 붙였다. 우측 하단은 수채화라 얇고 가벼운 느낌이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겹쳐 칠해 두꺼워진다. 초이앤초이 갤러리 제공

독일 현대미술가 데이비드 레만의 개인전이 8월24일까지 서울 종로구 삼청동 초이앤초이 갤러리와 청담동 호리아트스페이스, 아이프미술경영에서 동시에 열린다. 회화 32점과 드로잉 10점 등 42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장소의 특징과 작품의 성격을 고려해 두 개의 타이틀로 진행한다. 초이앤초이 갤러리는 ‘사랑을 또다시 믿는다(I believe in love again)’를, 호리아트스페이스와 아이프미술경영은 ‘사랑은 죽음보다 뜨겁다(Love is hotter than death)’를 내걸었다. 

 

데이비드 레만은 “동년배 작가들이 지켜야 할 기준을 세운 새로운 예술가”라는 평을 받을 만큼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작품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특히 내면의 주관적인 감정과 대상의 본질을 꿰뚫는 조형언어는 관람객의 감각을 순식간에 사로잡는 강점으로 작용한다. 순간의 감정을 토해내는 듯한 강렬한 색감과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붓 터치는 확실한 매력 포인트다.

 

초이앤초이 갤러리 최진희 대표는 “어떤 형식이나 장르적 틀에 얽매이지 않고, 회화와 드로잉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조형어법을 구사하며, 특유의 젊은 감성으로 독일 현대회화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가”라고 레만을 소개한다. “그의 천재적 재능은 이미 학창 시절부터 수많은 상장과 장학금을 독차지할 정도였고, 2016년 독일 브란덴부르크 연방주에서 수여하는 ‘젊은 예술가상 최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고 덧붙였다.

 

‘이노센스’. 상상으로 만들어낸 동물이다. 순진무구를 상징한다. 초이앤초이 갤러리 제공

2019년 ‘독일 이머징 회화작가 특별 순회전’의 53인 젊은 회화작가 중 한 명으로 초대된 예도 빼놓지 않았다. 이때의 심사위원단은 독일 미술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술인 50인으로 구성돼 화제를 모았다. 1차로 뽑힌 200명 작가의 작업실을 모든 심사위원이 2년에 걸쳐 일일이 방문해 최종 53명을 선정했다. 레만의 잠재적 역량과 비전이 검증된 셈이다.

 

그는 1987년 독일의 구동독 소도시 루카우에서 태어나 코트부스에서 자랐다. 중학교 때 드레스덴의 미술관에서 접한 올드마스터 페인팅들을 보고 감명을 받아 화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결국 베를린 국립예술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고향 코트부스로 돌아가 전업 작가로 활동 중이다.

 

‘페인트 갓’. 래퍼 에미넴의 가사에서 따온 제목이다. 시간을 상징하는 달팽이에 시계를 그려 넣었다. 초이앤초이 갤러리 제공

“한때 사랑을 믿었지만 어떤 이유로 그 경험에 실망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사랑을 또다시 믿는다’는. 그러나 마침내 위험을 감수하고 희망을 가지며 사랑에 재도전, 즉 또다시 삶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저에게 사랑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고요. 또 다른 제목인 ‘사랑은 죽음보다 뜨겁다’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 ‘사랑은 죽음보다 차갑다’에서 빌려온 겁니다. 제 작품의 키워드는 철학, 감정, 색채, 영화, 미술사, 열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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