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머무는 시간"..헬레나 파라다 김, 서울 전시로 한국관객과 만나다

헬레나 파라다 김 ‘빛이 머무르는 시간’ 展 교포 2세 시선으로 본 파독 한국 노동자 동서양 경계 넘나드는 미학 성찰
변옥환 기자, 파이낸셜뉴스, 12 June 2025
[파이낸셜뉴스] 이민 1세대의 삶과 다문화 정체성을 섬세한 예술 언어로 풀어낸 재독 한인 이주민 2세대 화가 헬레나 파라다 김의 개인전(사진)이 오는 28일까지 서울 초이앤초이 갤러리에서 열린다.

사단법인 한독문화교류협회, 주한 독일대사관, 갤러리 초이앤초이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이번 전시는 예술을 통해 한국과 독일, 이주민 세대의 기억과 정체성이 교차하는 뜻깊은 장이 되고 있다.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는 헬레나 파라다 김은 이민 1세대인 한국인 간호사 어머니와 스페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독일 쾰른에서 자랐다.

다양한 정체성과 문화적 배경 속에서 성장한 파라다 김은 우연히 보게 된 어머니의 옛 앨범 속 파독 간호사들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게 됐다. 이후 어머니의 나라인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큰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파독 간호사, 한복, 제사 등의 한국적인 소재들을 자신의 작품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군가가 입었던 '전통 한복'이 지니는 서정적이면서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주제로 다양한 연작을 제작했다.

그녀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한복은 한 개인의 역사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해 집단의 역사로 확장됐던 특정한 시대와 순간의 형상화를 통해 관람객들을 인도한다.

또 몇 년 전부터 베를린 작업실 뒤에 방치된 정원을 우연히 돌보기 시작한 작가는 자연을 다룬 정물화에 심취해 다양한 식물과 꽃이 주는 분위기를 캔버스에 옮긴다.

이 아름다운 정물화들은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답지만 동시에 그 끝이 존재하는 우리의 삶에 대한 명상을 이끌어낸다.

이번 전시에서는 특히 구리판 위에 그린 회화 작품들, 한국적인 주제에 서양 기독교 미술 요소를 접목한 새로운 시도가 주목을 받고 있다. 파라다 김은 이 작업을 통해 한국이라는 뿌리와 서구 문화 속에서 자란 성장 배경이 어떻게 충돌하고 공존하며, 또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 왔는지를 조용히, 그리고 깊이 있게 보여준다.

전시 기간 중 진행된 아티스트 톡은 단연 이번 전시의 백미였다. 지난 5월 16일 서울, 5월 21일에는 작가의 어머니 고향인 부산에서 관객과의 의미 있는 만남이 펼쳐졌다.

부산에서는 장대현학교 탈북 중·고등학생들과 부산 지역 대학에서 독일어와 유럽학을 공부하는 청년들이 다수 참여해 다문화적 환경과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오갔다.

작가의 예술적 성취의 원천에 대한 질문에 파라다 김은 "우리는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과 자신의 결핍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려 했어요. 제 예술은 바로 그 질문과 마주한 토양 위에서 자라났어요"라고 솔직히 대답했다. 이는 현장에 있던 많은 청년들에게 묵직한 울림을 안겨주었다.



작가는 또한 한복 연작과 관련한 개인의 경험도 공유했다.

본인의 어머니는 물론 이주한 모든 한국 여성이 고국에서 자신의 한복을 만들어 가져왔고, 수많은 이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한복을 정성스럽게 간직하시는 모습은 그녀에게 특별한 인상을 남겼다. 그 한복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낯선 땅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잊지 않기 위한 조용한 힘과 같은 존재였다고 그녀는 회상했다.

특별히 이번 전시의 한복 연작은 전통 한복 위에 서양 기독교 성인의 이미지와 17세기 이탈리아 여성 화가들의 꽃무늬 패턴을 덧입혔다. 서구 미술의 상징성과 한국의 전통적 정서를 조화롭게 담아낸 이 작업은 이주 여성 부모 세대가 살아 낸 다문화의 삶을 시각적으로 재해석한 탁월한 시도다.


파라다 김은 아티스트 톡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작품들은 단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척박한 이주 환경 속에서도 삶을 아름답게 채워낸 나의 어머니와 그 시대 이주한 모든 독일 1세대 디아스포라에 대한 기록이자 헌사입니다."
그 말은 예술이 전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형태의 기억으로 현장에 있던 모든 관객들에게 진한 감동을 만들어냈다.

lich0929@fnnews.com 변옥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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