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nder Maple Trees], 2025, 구리판에 유화, 프레임 포함, 50 × 40cm. © CHOI&CHOI Gallery and the artist

[Amitabha Buddha], 2021, 리넨에 유화, 250 ×185cm. © CHOI&CHOI Gallery and the artist

[Nurses and Cranes], 2025, 알루미늄 복합 패널 위 유화, 프레임 포함, 60 × 80cm. © CHOI&CHOI Gallery and the artist

© CHOI&CHOI Gallery and the artist
초이앤초이 갤러리 <In Times of Light>
헬레나 파라다 김
독일 쾰른에서 자란 한국계 스페인 작가 헬레나 파라다 김은 이민 1세대 간호사인 어머니의 사진첩에서 영감을 받아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회화로 풀어낸다. 특히 전통 한복에 담긴 개인의 서사를 집단적 기억으로 확장한 연작들을 선보여왔다. 최근에는 작업실 뒤 정원을 가꾸며 시작된 자연에 대한 관심을 식물 정물화로 이어가고 있으며, 피고 지는 꽃의 이미지에 삶과 죽음에 대한 명상적 시선을 담고 있다.
전시 제목인 <In Times of Light>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 ‘빛’은 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들을 직접적으로 지칭하지는 않지만, 이 제목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안에 담긴 긍정성과 희망 때문이다. 정치적 불안과 전반적인 비관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예술은 조용한 저항이 될 수 있다. 해답은 제시하지 않더라도, 아름다움은 위안이자 인간성을 지키려는 몸짓이 된다.
대표작 ‘Stella Maris’는 르네상스 회화와 한국 전통 혼례복인 활옷이 만난 작품이다. 활옷은 정교한 수공예뿐 아니라 세대를 잇는 ‘기억의 그릇’이라는 점에서 매혹적이었다. 조선시대 여성들이 혼례식에 단 한 번 입고, 딸에게 전하던 예복.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닳고 수선되며 조각보처럼 변해갔다. 나 역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품고 있어, 그런 조합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이 작품에서는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성모자상’을 인용했고, 활옷 속 창처럼 보이는 부분엔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장면을 삽입했다.
‘Nurse and Cranes’ 연작에는 어머니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어머니의 사진 앨범에서 발견한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되었다. 1960년대 중반, 어머니는 간호사로 독일에 오셨는데 그때 찍힌 사진 속 단정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배경은 창덕궁의 19세기 병풍 이미지인데, 유니폼 입은 여성들과 학의 형태가 닮아 있다는 점에서 착안했다. 이 연결을 통해 여성 이주의 경험이 더 큰 신화적 서사로 확장되기 바랐다.
흐릿한 얼굴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어떤 의도가 있는가? 학창 시절에는 생생한 초상화를 많이 그렸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실성보다는 ‘부재’와 ‘여백’이 더 중요해졌다. 특히 ‘Hanbok Figures’ 연작에서는 특정 인물이라기보다 아우라를 지닌 존재로 인물을 그린다. 그들은 실제 한국 이주 여성들이지만 동시에 다양한 디아스포라의 상징이기도 하다. 흐릿함은 멜랑콜리와 연결되며, 정체성의 점진적 소실에 대한 조용한 성찰이다.

[Green Earth], 2025, 리넨에 유화, 140 ×100cm. © CHOI&CHOI Gallery and the artist

[Stella Maris], 2024, 리넨에 유화, 150 × 200cm. © CHOI&CHOI Gallery and the artist

[San Geronimo], 2021, 리넨에 유화, 230 ×160cm. © CHOI&CHOI Gallery and the artist
직물이나 병풍 등 디테일은 아주 선명하게 묘사된다. 내 회화의 핵심은 선명함과 여백의 균형이다. 직물의 질감 같은 감각적인 요소를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을 즐긴다. 동서양 회화 전통을 모두 참조하며, 그 경계에서 작업한다.
작업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은? 언제나 ‘만남’에서 시작된다. 사람일 수도, 예술 작품이나 감정일 수도 있다. 보이지 않던 기억을 가시화하는 과정이다. 미완의 그림을 멀리서 바라보며 그 가능성을 상상하는 순간이 가장 즐겁고, 가장 어려운 순간은 ‘언제 이 그림이 완성되었는가’를 판단하는 일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관객도 나처럼 어떤 ‘만남’을 경험하기 바란다. 이름 없는 인물들이 감정을 환기하는 순간. 물론 이주 여성, 간호사 등의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나는 뿌리 뽑힘, 정체성의 탐색, 상실, 융합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결국 무엇을 느낄지는 관객의 몫이다.
앞으로 시도하고 싶은 주제나 매체가 있다면? 최근엔 금속 표면에 그리는 데 흥미를 느끼고 있다. 반사성 있는 재질은 또 다른 감각을 선사한다. 식물 이미지 연작처럼 개인사와 무관한 작업도 병행하고 싶다.
현재 준비 중인 프로젝트가 있다면? 곧 쾰른의 브라운스펠더에서 전시를 연다. 병풍 형식의 작업이 중심인데, 수련을 주요 모티프로 삼았다. 이와 더불어 쾰른 동아시아미술관에서 선보일 병풍 작업도 진행 중이다.
요즘 가장 큰 영감을 주는 것이 있다면? 작업실 정원. 자연의 색과 질감, 곤충과꽃 등에서 끊임없이 영감을 받는다. 조용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끝없이 새로운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