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나 파라다 김의 ‘Stella Maris’(2024) [초이앤초이 갤러리]](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6/09/news-p.v1.20250608.acc5960b62fb4271ad4460f773b01a11_P1.png)
![작가 헬레나 파라다 김 [초이앤초이 갤러리]](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6/09/news-p.v1.20250608.763759f235524d329ae925518703fdf1_P1.png)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서울 삼청동 초이앤초이 갤러리에서 열리는 헬레나 파라다 김(43)의 개인전 ‘빛이 머무는 시간’은 서로 다른 문화권을 나란히 보여주거나 갖가지 상징을 나열하는데 머물지 않는다. 이 전시는 한국 전통의 미학과 서양 회화의 이미지를 억지로 결합하는 대신, 그 둘이 맞닿아 일렁이는 물결 같은 감정을 따라간다. 그렇게 전통과 지금, 동양과 서양,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 흩어지기 쉬운 정체성을 조용히 꿰매듯 이어 붙인 한 폭의 화면이 다정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목소리로 끊임없이 말을 걸뿐이다. ‘나는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 말이다.
전시의 중심에 자리한 ‘스텔라 마리스’(Stella Maris)는 조선시대 신부의 예복인 활옷 위에 서양 르네상스 시대 화가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성모와 아이’를 정밀하게 수놓은 듯한 회화다. 다산과 장수를 상징하는 봉황과 연꽃 자수 문양 위에 서양 종교화의 은은한 광채가 겹쳐진 이 그림은 서로 이질적인 두 세계가 하나의 숨결로 공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작가는 둘 사이의 경계를 허물기 보다 그 틈에 스며드는 온기를 펼쳐 보인다.
스텔라 마리스는 ‘바다의 별’이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를 부르는 또 다른 호칭이다. 동시에 낯선 바다를 건너온 여성들의 삶, 그 바닥에서 길어 올린 무언의 기도를 떠올리게 한다. 전통 혼례복의 정성스레 놓인 문양 위로 서양 성화의 성스러운 형상이 겹쳐지면서 두 문화는 서로의 그늘을 덜어내며 감싼다. 익숙한 상징은 새로운 정체성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리고 그 거울은 이방인의 삶을 보는 이의 마음 가까이 가져다 놓는다.
![헬레나 파라다 김의 ‘Green Earth’(2025) [초이앤초이 갤러리]](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6/09/news-p.v1.20250608.6faa4896fb3246fc916e9d0c89a3e616_P1.png)
![헬레나 파라다 김의 ‘Veronika’(2024-2025) [초이앤초이 갤러리]](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6/09/news-p.v1.20250608.eb9674f42ce047f2bcf9a9e99d146f8e_P1.png)
헬레나 파라다 김은 1966년 독일로 간 간호사였던 한국인 어머니와 아마추어 화가인 스페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자랐다. 그의 회화는 이 겹겹이 포개진 배경에서 건진 기억의 실타래로 직조된다. 화면 속 한복은 어머니, 이모, 비슷한 처지의 간호사들의 옷들에서 가져온 실물의 기억이다. 하지만 그 옷을 입은 인물들의 얼굴은 희미하게 흐려지거나 아예 비워져 있다. 작가는 얼굴 대신 옷의 무늬에 시선을 머물게 하고 개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수많은 여성들의 흔적과 시간으로 관람객을 이끈다.
때론 작가 개인의 이야기에서 출발한 작품들이 지나치게 특정한 삶에 갇히곤 하는데, 그의 회화는 그렇지 않다. 한복이라는 이미지가 이끄는 시간의 흐름과 정체성의 흔적, 더 나아가 여성성과 모성의 주제는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여러 질문들과 닿아있어서다.
정체성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떻게 이어지는가. 전통은 어떻게 지금 여기의 삶과 감각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보이지 않았던 여성들의 삶은 어떻게 기억되고 예술로 말해질 수 있는가. 그림을 바라보며 그 질문들이 은유하는 세계를 가만히 붙잡고 있다 보면, 한 문화가 다른 문화의 거울 속에서 새롭게 비치고 그 낯섦이 오히려 새로운 이해의 문을 연다는 사실을 일깨우게 된다.